응급실 뺑뺑이에 대한 기사가 오늘 인터넷 뉴스 헤드라인에서 보이네요.

구급대 연락을 받은 병원들은 '소아 진료 불가' 등을 이유로 거부했고, 일부 병원은 환자 심정지 후에도 "소아 심정지 불가"라는 이유로 환자를 받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왜 그랬을까?
서울고등법원 2023.10. 소아 응급수술 10억 배상 사건은, 현장에서 왜 소아 중증 응급에 더 방어적으로 대응하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판례입니다.
2015년 생후 5일 된 신생아가 녹색 구토를 보여 동네 소아과를 먼저 방문했고, 여기서 ‘중장 이상회전·꼬임(중장염전)’이 의심되어 상급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병원에 당시 소아외과 세부전문의가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당직을 서고 있던 외과 교수는 세부 전공이 유방외과였지만, 시간을 더 지체하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고 판단해 결국 응급 수술을 시행했습니다.
그러나 수술 후 상태가 악화되어 재수술까지 진행되었고, 장의 대부분을 절제하는 상황에 이르면서 아이는 중증 장애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보호자 측은 약 15억 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1심 재판부는 “소아외과 세부전문의가 아니더라도 외과전문의로서 수술은 가능했고, 그 시점에 다른 병원으로 전원했다면 오히려 더 위험했을 것”이라는 취지로 판단하여, 의사와 병원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2023년 10월 서울고등법원 항소심은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항소심은 병원과 당직 의사에게 약 10억 원(청구액 15억 중 약 70%)의 배상을 명령했고, 그 중 약 1,000만 원은 수술을 집도한 외과의 개인이 부담하도록 했습니다. 즉, “소아 세부전문의가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응급 수술”에 대해, 결과가 나쁘게 끝난 책임을 상당 부분 병원·의사 쪽에 돌린 것입니다.
이 판결이 나오자 의료계에서는 여러 기사와 논평을 통해 상당히 비관적인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현장의 많은 의사들은 이 판결을 “소아응급환자라도 소아 세부전문의가 없으면 받지 말라는 메시지로 읽힐 수밖에 없다”고 받아들였습니다.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수술을 했더라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수억에서 수십억까지 손해배상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았고, 특히 소아 환자의 경우 성인보다 향후 생존기간이 길고 후유장애 기간도 길어 손해배상액이 성인보다 수배 이상 커질 수 있다는 점이 강조되었습니다.
대한응급의학의사회 등에서도 “이런 판결들을 보고 있으면, 위험을 감수하고 수술하는 것보다 아예 받지 않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공개적으로 나왔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현장에 매우 강한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곧, "소아 중증 응급을 우리 역량 밖에서 무리하게 맡았다가 결과가 나쁘면 수십억 배상 책임까지 질 수 있다”는 공포가 생긴 것입니다. 이 공포가 누적되면서, 많은 병원들이 “애초에 우리 병원은 ‘소아 진료 불가’라고 분명히 선을 긋고, 수용을 거절하는 편이 법적·경제적 리스크를 줄이는 길”이라고 판단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행동을 밀어붙인 측면이 있습니다.
지금 응급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소아 진료 불가”, “소아 심정지 불가”라는 말 뒤에는, 바로 이런 판례가 남긴 깊은 흔적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이번 부산 고교생 사례에서도
구급대가 경련과 Pre-KTAS 2 (긴급) 소견으로 권역·지역응급의료센터 위주로 14곳에 연락했지만, 다수 병원이 “소아 진료 불가”, “소아 심정지 불가”를 이유로 거절한 것으로 나옵니다.
이 “소아 진료 불가”라는 표현은 단순한 멘트가 아니라, 법적으로는 “우리 병원은 소아 중증 응급에 대해 인력·시설·장비가 부족하니 응급의료법상 정당한 진료거부 사유에 해당한다”는 자기 방어 문구이고,
판례·제도적으로는 “서울고법 10억 판결 같은 소아 중증 응급 리스크를 지지 않겠다”는 민·형사 책임 회피 전략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런 잘못 설계되거나 과도하게 해석된 판례와 사례들은, 환자 보호를 위한 책임 규명이 아니라 ‘위험한 환자는 되도록 건드리지 말라’는 신호로 작동하면서 의사들의 임상 결정을 왜곡시키는 부작용을 낳습니다.
특히 소아·중증 응급처럼 본질적으로 예후가 불확실하고, 결과가 나빠질수록 손해배상액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영역에서는, “눈앞의 환자에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처치를 하라”는 의료윤리적 명령보다 “나중에 법정에 설 위험을 최소화하라”는 방어적 본능이 더 강하게 작동하게 됩니다.
그 결과, 실제 역량 범위 안에서라도 시도해 볼 수 있는 치료마저 포기하거나, 소아를 아예 받지 않는 쪽으로 시스템이 기울면서, 가장 보호받아야 할 취약 환자들이 오히려 의료체계 밖으로 밀려나는 역설적인 상황이 반복됩니다.
잘못된 판례와 정책이 쌓일수록, 의사들이 환자를 살리기 위해 판단하기보다 내가 얼마나 덜 다칠지부터 계산하도록 강요받는 구조적 악순환이 더 심해집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사건은 몇몇 병원이 응급실 문을 닫아걸었다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응급의료 시스템 전체가 ‘책임 있는 진료’보다 ‘책임을 피하는 진료’를 강요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경고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처음 인터넷 기사의 댓글입니다.
무슨 문제만 생기면 늘 ‘의사 기득권 탓’, ‘의사 수만 늘리면 해결’이라는 식의 주장이 반복되지만, 이제는 그런 주장들을 일일이 설득해 보겠다는 생각 자체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설령 의사 수를 두 배로 늘린다 하더라도, 새로 증원되는 의사들 역시 현재 의료현장에서 일하는 의사들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들 또한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신세계의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이 사회와 같은 제도와 환경 속에서 자라난 또 다른 우리가 의사의 길을 선택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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